청소년기 스카우트 생활을 7년을 했다. 중1때부터 대학교 1학년때까지 했으니 대부분의 청소년기 추억이 스카우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3때는 스카우트 띠에 자격증을 다 따서 더 이상 붙일 공간이 없었다. 도보성지순례는 3년 내내 갔으며 마지막 청소년 훈육 자격증도 땄다. 전국에 30명만 준다는 무궁화 스카우트 훈장도 받았다. 보통 1년에 캠프를 2~3번은 갔던 것 같다. 성당 캠프까지 포함하면 1년에 4번 이상은 캠프 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야외생활이나 캠프생활은 나에게 굉장히 익숙하고 편하다. 인생을 살면서 전반적인 삶의 방향을 형성하는 시기가 중2, 15세라고 하던데 되짚어보니 그 시절 내가 배운 건 도전, 열정, 봉사, 헌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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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으로 가득찼던 10대  (0) 2015.03.30

 

 

소중한 10대가 지나갔다. 20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 돌이켜보면 나의 10대는 '재미' 그 자체였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까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촘촘히 기억이 난다. 자잘한 사건들,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희노애락했던 마음들이 기억 속에 겹겹이 쌓여있다. 가끔 생각이 날 때면 추억을 떠올려보지만 직접 손으로 만지고 보고 들으며 느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힘이 쭉 빠지긴 하지만 기억이라도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놔야겠다.

 

-유치원
유년시절의 동네는 분당이다. 정확히는 분당 이매동.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 고향이라고 하던데 그럼 나는 분당이 고향이다. 여기는 29평 남짓한 엄마아빠의 신혼 공간이다. 아마 첫번째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던 곳인 걸로 기억한다. 이때는 아직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이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제일 그리워하는 시절이다. 당시 분당이 개발되기 전이라 자연 그대로의 공간이 많았다. 잠자리가 떼로 몰려있는 탄천, 단지 내를 가득 둘러싸는 숲, 그 숲에서 살고있는 사마귀와 메뚜기, 방아깨비, 여치의 얼굴이 기억난다. 비가 오는 날에도 세발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가 이 숲 주변을 뱅뱅 돌았었다. 분홍색이었는지 하늘색이었는지 파스텔 톤 쫄바지가 구정물에 더러워지도록 놀았었다. 놀 곳이 많아 놀이터가 따로 필요없었다. 7층에는 701호부터 708호까지 8개의 가구가 살았었는데 복도식인데다 대부분 우리 또래여서 조용할 틈이 없었다. 703호인 우리집은 701호 명수아줌마네랑 제일 친했는데 엄마가 일 나가면 우리는 명수아줌마네 쇼파 위에서 뛰어놀았었다. 그런데 명수아줌마는 항상 무너지려는 쇼파를 위로 올리면서도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아저씨도 사람이 좋아 항상 웃기만 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명수아줌마는 명수오빠랑 혜진이의 엄마인데 명수오빠는 우리 언니랑 동갑이었다. 아마 내 기억에 명수오빠가 우리언니를 좋아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혜진이는 드센 나를 그렇게 쫒아다녔다지 아마? 다른 가구들 중에서도 특히 우리 넷이 친해서 우리는 우리끼리 뭉쳐서 골목골목을 탐방했다. 상가에 알라딘이란 돈가스집이 있었는데 돈가스도 일품이었지만 소스와 스프가 더 맛있었다.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음식점이었다. 가끔 공연도 보러 다녔었다. 기억나는 건 피터팬이랑 미녀와 야수. 예술의 전당 큰 홀에서 봤던 공연이라 내겐 젤 멋지게 각인된 작품이다. 유치원에 다녔을 때를 기억하자면 나는 사회생활이랑은 거리가 먼 아이였다. 친구를 사귀지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지도 않았다. 그저 새롭고 신기한 걸 쫒아다니기 바빴다. 오늘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보다는 선생님이 입고 온 옷, 신발, 화장, 표정, 놀이, 체육활동이 제일 관심사였다. 남자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인형놀이나 레고를 만들때도 나는 평행봉에서 운동을 하거나 밖을 뛰어다녔다.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이때는 수업내용과 친구들이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기억나는건 하나, 작은 새다. 그 새가 어떤 종류였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어느 날 유치원 뒷마당에 새 한마리가 다리를 절면서 떨어져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날지를 못하고 푸드득 입으로 소리를 내며 누워있었다. 살려달라는 눈빛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날고싶다고 애원하는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해서 이 새를 잡아 다리를 좀 만져줬다. 어떻게 만졌는지는 기억이 안나고 그냥 조금 만져보고 풀을 뜯어서 다리를 감싸보려도 하고 잠시 애를 썼다. 그리고 다시 유치원 담장 위에 올려놨다. 새를 계속 보려는데 선생님이 부르셔서 들어갔고, 다음날 그 자리를 가보니 새는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옛날 동화였던 흥부놀부전을 떠올렸고 부러진 새 다리를 묶어서 구해준 내게 새가 선물이 가득 든 박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물론 그런 일은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가는 길에 우리 동 앞에 새 한마리가 죽어서 누워있었다. 자세히 보니 추워서 얼어있었는데 날개도 젖어있고 얼어서 이미 동사된 상태였다. 나는 유치원에서 봤던 새가 떠올랐고 물론 다른 새였겠지만 마음 한켠이 괜시리 아팠다. 그래서 엄마를 불러서 아파트 주변에 새를 묻고 나뭇가지로 팻말도 만들어 외롭지 않게 해줬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랑 처음으로 친구한 게 바로 새다. 그 새 이름은 아직 짓지 못했다. 마음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이때 하늘을 나는 새를 그렇게 부러워했었는데 이 새를 묻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날 수 없는 새구나. 날개는 없지만 내가 더 낫다.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나는 그렇게 자유를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막 용어가 바뀌는 해에 딱 내가 걸렸다. 그래서 1학년은 국민학교고 2학년부터는 초등학교다. 역사를 중간에 걸치고 있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기도 하다. 초등학교때는 합창단을 했었다. 동요를 종류별로 연습했고 KBS 어린이동요세상에도 출연했었다. 문창초등학교랑 대결을 벌였었는데 가끔 용산역을 가다 문창초등학교가 보이면 당시 분위기가 생각난다. 끼 많은 유정이랑 같이 회색 모자쓰고 회색 치마에 하얀 브라우스, 빨간 멜빵을 메고 노래를 불렀었다.

-중학교
중학교때부터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입학하자마자 방송반 시험을 보고 교내 아나운서로 3년간 활동했다. 아침 우유배달, 교내 행사공지, 축제 사회까지 가열한 3년을 보냈다. 이때는 스카우트도 시작을 해서 중학교 3학년때는 전국에 30명의 우수대원을 뽑는 무궁화스카우트대회도 참가했다. 자격증을 한 40개는 땄었나...? 무섭게 따서 결국 무궁화 훈장을 받아냈다. 성당에도 꼬박 나서 성가대, 밴드부, 성서읽기반에도 참여했고 캠프란 캠프는 몽땅 갔다. 아마 1년에 스카우트랑 성당을 합쳐 6번의 캠프는 다녔던 것 같다. 날 챙겨준 엄마도 참...대단하고 고맙다. 마음이 뭉클해지네.. 엄마아빠. 경기도 환경기자단 활동도 했었다. 활동을 좋아하고 사람만나길 좋아하는 나를 보고 미술선생님이 추천해준 활동이다. 환경조끼를 받고 경기도 내 환경을 책임지는 기사를 쓰는 일이었다. 이때 무슨 기사를 썼었는지 기억이 안나는게 문제다. 그냥 나는 활동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 나에게 신문에 대한 영감을 줬던 일이 있다. 바로 가족 신문 만들기. 수행평가를 특히 좋아했던 내게 가족신문 만들기는 재미있는 추억을 안겨줬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책, 취미, 특징, 가족이야기를 담으며 정말 재미있다고 느꼈다. 학급신문을 만드는 일도 재미있게 참여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담는 신문이라 더 특별하게 느꼈던 것 같다. 이때 서로를 더 깊게 알 수 있고 다양한 시각을 넣어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신문이 참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신문의 역사나 글의 질을 담는 글보다는 주로 사람, 마음, 사랑을 중심으로 한 단어를 많이 선택했던 걸로 기억한다. 항상 공부를 등한시했던 나이기에 신문의 질은 그리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 마음 속에만 아주 좋은 퀄리티로 남아있지.

-고등학교
고등학교는 우리가 1기였다. 직접 교복도 공모하고 급식소도 지정하고 수학여행은 어디로 갈지 수능 때 사회 교과목은 뭘로 설정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주체적으로 우리가 계획했다. 제도도 규율도 분위기도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서 전교생의 학교에 대한 참여도도 매우 높았다. 이후에 선생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때의 우리가 다른 학년에 비해 끼도 재능도 많고 총명함도 남달랐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선배도 없고 전교생이 모두 친했었던 1기의 영향이 아닐까싶다. 다신 가져볼 수 없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난 여기서 어떤 동아리를 만들까 고민을 하다 신문반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소라라는 친구를 회장으로, 나는 편집장으로 해서 6개월에 한차례 신문을 만들었다. 이름은 HOTBN. 영자신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핫비엔으로 지었는데 입에 딱 붙지 않아 나중에 후회를 했던 신문제목이다. 교내 이야기, 선생님 인터뷰, 학교 정보나 소식을 주로 담았고 발행하기 전에는 밤을 새는게 일쑤였다. 선생님도 함께 밤까지 남아 영어를 해석하고 문장을 가다듬었다. 이때 김상희 선생님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 신문반은 1부도 발간하지 못했을 거다. 영자신문반과 더불어서 우린 영자신문배포반도 만들었다. 아침마다 영자신문을 학급별로 돌리고 today's english라는 김상희 선생님의 영어속담북 홍보를 도왔다. 복도에 걸려있는 영어속담지를 매일 바꾸고 실용영어를 홍보했다. 그렇게 공부는 하는둥 마는둥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 하기를 좋아하는 활동녀로 3년을 보냈다. 심지어 고3때는 문과에서 6명만 들어갈 수 있는 호학반에 들어갔는데도 내 발로 차고 나왔다. 호학반을 따로 만들어서 일반반과 나누어서 수업하는 방식이 싫었다. 추운데서 야자하는 친구들은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이렇게 차별과 박탈감을 받는게 싫었다. 실력을 테스트하는 방법도 단순암기를 측정하고 누가 더 엉덩이를 붙였는지 인 것 같아 기분이 안좋았다.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 끼, 가능성을 보는게 아니라 현재의 점수로만 평가하는 교육제도도 싫었다. 단순 반항심이 들어서 공부도 안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은 꾸준히 했지만 공부는 확실히 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정의로웠던 것 같다. 그리고 고3때는 전국적인 행사가 많았다. WBC야구월드컵도, 2006년 독일월드컵도 있었다. 고3이었지만 거의 모든 응원전에 참여하고 대학을 갈 것을 고민하는 것 보다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 건지 매일 고민하고 상담했었다. 돌이켜보면 꿈을 정하고 대학이란 목표를 정하고 치열하게 공부했어야 할 시절, 나는 3년이란 어두운 시간을 꿈같이 놀았다. 새벽에 친구들과 마음 잡을 곳 없이 방황했던 시절마저도 10대라는 이유로 모든게 덮어졌다. 공부는 덜했었지만 10대의 마지막 참 잘 보낸 것 같다. 그립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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