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생각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사물을 보고 단순히 표면을 보고 형태를 읽고 내피와 외피를 분석하고 쓰임과 유용성, 기분과 감정을 드러내는 르포적인 글쓰기가 있는가하면, 사물을 보고 그 사물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본질까지 꿰뚫어서 의미를 부각시키는 철학적 글쓰기가 있다. 나는 본질을 꿰뚫어내는 철학적 글쓰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현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사회적 과학적 영향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연구하는 사고의 흐름을 더 선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론을 쉽게 빗대어 쓴 학문적 글쓰기다. 이것은 굉장히 어렵고 또 많은 지식과 이론 상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가 단순한 글쓰기보다 읽혀지진 않지만 중요도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대학이란 공간에서 진리를 논하고 검증된 이론을 외우고 암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라는 불완전한 곳에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한국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을 졸업한 현실에서 우리들의 대화는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더 깊이있는 대화가 오고가야 한다. 학문적 글쓰기와 토론, 진리를 추구하는 공간이 보편적으로 많아질 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단순하게 보지 않기. 어렵게 생각하기. 이게 개인과 사회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다.

 

기자의 본질은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하는데 있다.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사실에 기반한 글을 다양한 각도로 심도있게 쓰고 개인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과 같다. 글의 가치는 전적으로 기자가 어떤 지식과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국민에게 올바른 알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평등주의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것에 동의한다. 또 지속적인 글쓰기와 토론은 더 많은 이념을 포함하는 세계적인 수준의 담론을 기대할 수 있다.

 

 

 

 

 

 

  지난 25일 규모 7.8의 강진이 네팔에 몰아쳤다. 네팔 내무부는 어제 오후 10시 사망자가 3837명, 부상자 6800여명, 이재민 약 660만명으로 피해인원을 발표했다. 81년 만의 최악의 지진이었는데 계속 비가 내리고 먼지로 인해 구조가 어려워져 피해자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다. 어제 기아대책 국제구호단체의 한 청년으로부터 사진을 받았다. 정부지원은 없고, 단체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해서 자원을 받아 출발했다고 한다. 대부분 밖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고 현재까지 100여 차례의 여진이 규모 6.7, 5 정도로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네팔은 현재 지반이 쿨렁대는 상황에서 자체 병력 10만여명과 전 세계 구호팀이 운집했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어제 본국으로 송환됐고, 카트만두에서 북서쪽으로 81km, 포카라에서 동쪽으로 68km 떨어진 본 진원지 람중과 고르카는 아직 구조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구조팀은 주로 물품 후원 키트, 의료 봉사를 중심으로 긴급구호활동을 지원하고있으며 현지에서 군경 합동 재난관리위원회가 소집됐고 UN OCHA에서 관련 회의를 진행중이라고 한다. 지진 발생지역이 견고한 기반암으로 돼 있어 진동을 감소시킬 수 있었지만 네팔은 대부분 흙집으로 구성돼 있다. 지진에 약한 비보강 벽돌로 지어진 집이 대다수고 지진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약한 구조물이 피해 규모를 키웠다. 네팔은 사전에 피해 지역으로 지목받았으나 경제 사정이 열악해 지진 경고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은 네팔 카트만두의 27일 현지 풍경.

 

 

사건 발생에 대한 현상을 앞에 두고, 사실 그 자체로 바라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사실이란 사물에 대한 인식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사실은 진리와 얼마나 가깝고 또 떨어져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 현상의 가치가 평가된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우리는 학문을 공부하는데, 학문의 유일한 목적이 진리의 탐구일 때 참된 발견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무엇에도 속박됨이 없는 숭고한 학적인 정신에 매진할 때 그 문제를 풀어나갈 기백을 길러준다. 인격의 완성과 더불어 사실을 보는 눈의 변화, 진리를 탐구하자.

어느 카스에서 본 글에서 우리 나라 중산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10년 이상 한 직장에 다니고, 월 소득은 400만원 이상 되고, 30평 이상되는 아파트에 살며, 2000cc 이상 된 중형차를 타야한다.”

중산층의 조건이 집, 차, 학벌, 소득이란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전 대통령 퐁피두는 중산층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중산층은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구사하여 폭 넓은 세계 경험을 갖추고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 하나 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 접대를 할 줄 알며,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설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리더들은 어떤 모습일까? 초, 중, 고, 대학교 무려 16년의 성장기 동안 4년제 대학을 나오도록 권장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을 출세와 효도라 말하고, 소득과 아파트 평수와 차 종에 따라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평가한다. 자유로운 외국어 구사와 세계 경험, 악기와 손님 접대를 할 수 있는 지의 여부보다 그것을 가능케 할 경제적 소득을 더 궁금해한다. 그것을 가능케 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칭찬을 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으로 바라본다. 낚시를 하는 이유와 쓰임새에 대한 설명보다는 낚시터를 만들고, 고기를 잘 잡는 법만을 알려준다.

하지만 과연 프랑스의 중산층에 대한 정의에 대해 자국민들도 동의할까? 적어도 국민들의 의식이 동의하진 않는다 해도 리더의 한 줄이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물질에 대한 갈망을 넘어 사회의 관념적 의식이 바뀌는 순간 행복은 계층과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정말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달콤한 시간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내야’하는 의무가 있다면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조금씩 채워가는 즐거운 삶이 더 멋지지 않은가? 우리나라 리더도 이런 생각을 당당히 이야기하고 문화의 막강한 힘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경제력이 아닌 콘텐츠의 가치로 봐야한다.그 날이 슬며시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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