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이 울기 시작했다. 검고 쭈글쭈글해진 손으로 얼마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붉게 충혈된 눈, 누렇게 뻐드렁진 치아 사이로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노인은 이제 같이 어울릴 곳도, 일할 곳도, 심지어 따뜻한 우유 한 잔 마실 돈도 없다. 자식들이 순간 떠오르지만 키우며 돌보지도 못한 자신의 체면이 퍼뜩 서질 않는다. 짐짝 마냥 불편해 할 자식들의 시선이 체면보다 더 괴롭다. 가을의 풍요로 세상은 밝게 물들었지만 노인의 마음에 찾아오는 겨울의 속도는 매섭도록 빠르기만 하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봄과 여름이 보였기에 노인은 더욱 서럽다. 자신의 어릴적 추억으로는 위로되지 않는, 찾아오는 겨울 앞에 마냥 초라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노인의 인생에 가을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자연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뿐. 여름의 생기로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며 봄을 맞이했고 그건 계속 반복됐다. 하지만 지금 몸도 마음도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겨울은 찾아왔고 수확도 풍요도 없던 인생의 가을을 찾으려 기억을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었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동네 마을회관을 찾았다.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 위에 주름이 패인채 펜을 쥐고 있는 자신이 욕심이 가득해 보이기까지 하다. 옆에 놓인 TV에서는 연일 '노후복지'를 위한다고 머리칼 두꺼운 사람들이 나와 떠들어대지만 도대체 어디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고향에 있는 친구들처럼 농사라도 지었으면 많이는 못 벌어도 입에 풀칠만큼은 할 수 있지않을까란 생각에 후회도 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노인 옆에 노란 개나리색 꽃 모자를 쓴 아이가 서있다. 손에는 종류별로 꺾은 단풍잎 세 개가 들려있고 여름에 산듯한 튜브 모양의 머리끈은 뒷 머리를 동여매고 있었다. 아이에게 시선이 간 노인은 이 아이에게 사계절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찾을 수 없었던 두 계절이 아이의 온 몸에서 공기 중으로 풍겨나왔다. 아이의 계절이 풍기는 공기를 잡고 싶었지만 메마른 손가락 사이로 맥없이 사라졌다. 멀뚱히 쳐다보며 웃는 아이의 눈을 보며 노인은 생각했다.
'너의 가을이 지난 뒤에는 나처럼 혹독한 겨울이 아닌 따스한 봄이 찾아왔으면.. 그렇게 눈을 감는 세상이 오기를' 맑은 아이의 눈동자 속에 노인의 미소가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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