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1915 ~ 2000)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오후의 때가 오거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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